뷰티칼럼

머리카락(가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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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41회 작성일 19-09-25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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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의 구로공단 가발공장(현 가산디지털단지)은 시골에서 상경한 젊은 여인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그녀들의 노동으로 60년대 우리나라 가발산업은 빠르게 성장했고, 70년대 초반에 이르러 가발 수출 1억 달러로 가발수출국 세계 1위라는 쾌거를 거뒀다. 1억 달러 수출은 우리나라 총 수출량의 10%를 차지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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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선 살롱 드 메이페어 대표

당시 구로공단 여공들은 이 나라의 큰 산업역군이었다. 그 때문에 1975년 구로공단 여공들의 삶이 그려진 '긴 머리 소녀'라는 대중가요가 있었고, 1987년 구로공단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1인칭 시점으로 쓴 이문열 소설가의 '구로 아리랑'이 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가발의 역사는 5천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가발이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과 햇빛으로 부터 머리를 보호하는 것으로 쓰여졌고, 로마시대에는 남자들은 대머리를 감추고 변장을 위해 그리고 여자들은 다양한 헤어스타일과 색상을 원해서 가발을 썼다고 전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삼국사기'에 신라 성덕왕 때 당나라에 다리(옛날에 쓰던 가발)를 예물로 가져갔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고구려 고분벽화의 여인 역시 머리에 다리를 이용했다. 조선 영조 때는 가채(머리털이나 이와 유사한 것으로 머리 모양을 만들어 쓰는 것)가 크게 유행했는데, 다리값이 너무 비싸서 국법으로 가채를 금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가발이 유행한 이유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이야기를 빠뜨릴 수가 없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탈모를 숨기기 위해 항상 가발을 착용했고, 100여 개에 달하는 다양한 색상의 가발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나라 가발산업은 1970년대 중·후반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값싼 노동력을 가진 나라에서 가발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점점 쇠퇴하기 시작했다. 다만 탈모시장에서는 기술력이 동반된 가발이 여전히 수요가 있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가발은 어떠한 재료를 이용하더라도 기계나 로봇이 대체하기란 어렵다. 사람의 손끝에서 나오는 고도의 집중력과 섬세함으로 머리카락을 일일이 꿰매어야 하는 특징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가발 생산국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이유도 아마 손재주가 뛰어난 한국인들의 특징 때문이 아닌가 싶다.

화려한 역사를 뒤로하고 사라졌던 한국의 가발산업은 다시 한 번 패션의 한 축으로써 재기를 꿈꾸어야 한다. 나 역시 K-뷰티를 이끌어가는 한 사람으로서, 대한민국이 다시 가발종주국이 되는 그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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